나 어릴적!
우리집은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당장 내일 끼니마저 걱정해야하는 암담한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좋지 않은 사람들의 꾀임에 빠져, 이곳 저곳 투자를 하였다가 결국은 모든것을 잃고 경기도 북쪽에 있는 신탄리라는 곳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사방이 높은산으로 둘러 쌓인 작은 시골, 그 곳은 당시 휴전선과 가까운 경원선 종착지였다.
유난히도 겨울이 추웠고 그 시절 그 곳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해가지면 등유 남포(램프)에 의존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공부를 해야만 했었다.
아버지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손에 익지 않은 농사를 시작하셨다.
형은 일찍 군대를 지원 입대해 집을 떠났고, 다음이 집안일을 거들 나였다.
마흔여덟에 나를 낳으신 아버지는 그럼에도 항상 우리에게 엄격하셨다.
어린 나이에 가난의 쓰라림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훈육에 순종했다.
먼산에 희끗 희끗 남아있던 잔설이 사라질 즈음, 서서히 연분홍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따사로운 봄볕속에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산야는 점차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즈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산길로 십여리는 족히 될 거리, 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천수답으로 가셨다.
못자리를 준비하기 위해서라지만 농삿일엔 백치이신 아버지로선 그저 가느다란 희망의 줄기에 불과한 일이었다.
가끔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귐, 그리고는 인적이 거의 없는 고요한 산길을 한시간 이상 걸으시며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 없으셨지만, 나는 지나는 길 양 옆으로 흐트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 꽃향기에 취해 그 슨간만은 모든것을 잊고 작은 환희를 맛볼수 있었다.
그저 세상의 모든 날들이 이처럼 꽃으로 뒤덮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진달래가 필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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