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짓거리였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70년대초, 나는 아마도 지독하게 되먹지 못한 반항기였는지도 모른다.
개뿔, 인생의 심오함이 뭔지도 모르면서 주제넘게도 염세주의에 빠져 마치 세상을 다 산것처럼 보이는 모든것들을 부정하고 무의미한 일상에 진절머리를 쳤다.
기성세대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아예 없었고 뭐든지 불신하고 친구들과의 대화조차도 무의미한것으로 간주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세상이 너무 답답하고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러다 결국은 무작정 가출(지금도 우리 부모님께 크나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막상 아무도 반겨주지않는 낯선 도시에서 수많은 군상과 부딪기며 끊없는 분노와 자괴감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심신은 점점 더 황폐해져갔다.
이세상은 나하고 않맞는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구차하게 살다가 먼지처럼 늙어 죽는 것보다 싱싱할 때 불길처럼 살다갑시고 나름대로 내 갈 길을 찾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결국 군대였다.
당시는 월남전이 끝나지 않은 때였다.
전쟁터에서 정말 사내답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 가장 멋지게 살다가는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고 해병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때 듣기로는 해병대는 무조건 월남을 간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휴가나 외출을 나와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던 선배 해병들의 빨간명찰과 팔각모도 괜찮아 보였다.
집에는 알리지 않고 몰래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졸업증명서를 떼고 아버지 도장도 몰래 파 지원서 동의란에 찍어 후암동에 있던 서울지방병무청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7월초쯤, 후암동에 있던 해병대사령부 사병식당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였다.
모두 홀라당 벗은체로 도열하여 전신검사를 받고 있었는데 제법 더운 때라 열려있던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수시로 지나다니고 그중에는 군속인 듯한 여자들도 많이 보여 무지하게 쪽팔렸다.
그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모두 잔뜩 주눅이 들어 꼼짝못하고 서있는데 갑자기 “어이 저자식 봐라”는 소리가 들렸다 군의관인가 아니면 위생병이었던 것 같다,
주변을 살펴보니 내가 서있던 우측 옆줄에서 서 있던 한 녀석이 제법 듬직한 고추를 빳빳이 세우고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킥킥 소리가 들리고 그 와중에 나도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엄청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친구, 합격했는지는 모르겠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서는 주제넘게 모든 것이 제대로 된냥, 환상에 젖어 나는 전쟁터에서 죽으면 어디쯤 묻힐까하고 동작동국립묘지를 찾아가 둘러보기도 하고, 을지로입구에 있는 중앙극장에서 ‘패튼대전차군단’이라는 영화도 보고 하면서 8월말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실미도’사건이 터졌다.
뒤숭숭한 분위기속에 처음에는 무장공비가 서울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방송이 나더니 얼마후 진압이 된뒤에는 실미도에 수용되어 있던 공군죄수들이 집단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들어오면서 난동을 피웠다는 거였다.
그렇게 아는수 밖에
다음날인가 현장을 찾아가봤는데 신길동에서 노량진 쪽으로 가는 도로 ‘국정교과서’건물 앞으로 기억하는데 현장은 말끔히 치워져있었고 다만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검게 그을려 있는 것만 볼 수 있었다.
8월 30일이었던가. 21:00 서울역에서 단체로 여명호 인가? 그 열차를 타고 진해로 향했다.
경부선으로 내려가다가 새벽녘에 삼랑진에 도착, 역 앞에서 이른 아침을 먹었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맛없는 국밥은 처음이었다(그 지역에 사시는 분이나 연고가 있으신 분들께는 죄송).
전날 저녁도 제대로 먹지 않아 배는 고팠지만, 속이 뒤집히는 비린내, 누린내 때문에 두어숫갈 뜨다 말고 다시 열차에 올라 진해로 갔다.
경화역에 도착, 우리 풋내기 사복차림의 군상들은 어설프게 열을 지어 걸어서 훈련소로 들어갔다.
2정문을 통해 교육기지에 들어가자 완존 별천지였다.
모든 간판은 시뻘건 바탕에 노란글씨로 쓰여 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웬놈의 군가소리는 그렇게 크던지
팔월말 뙤약볕이 쏟아지는 연병장에 잔뜩 풀이 죽어있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신분확인과 하사관지원자 차출, 그리고 무지무지하게 많은 주의사항 등을 쏟아내는 동안 점심때가 되어 가는데 교관인가 소대장이 연단에서 잔뜩 폼을 잡고 “여러분들은 이제 동양최대의 왕자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라고 씨불였다
“왕자식당? 야 역시 해병대는 다르구나” 속으로 잔뜩 기대하며 더벅머리 울긋불긋 사복차림의 입대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이동,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건뭐 우선 냄새가 괴이했다.
전날 저녁도 제대로 못먹고 아침도 그냥 두어 숟갈 뜨다 말아 뱃속은 엄첨 허기져있었는데 식탁에 차려져있는 밥과 국을 보니 영 “이건 아니올시다”였다.
솔직히 나는 그때 가입대 기간 동안 짬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다.
짬밥통에 다버리고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저녁식사 시간후에 주어지는 PX이용시간에 빵과 사이다로 연명했다
그래서 별로 지니지 못했던 용돈도 금새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훈련병으로 들어서서는 기간병들이 짬밥통에 버린 밥도 손으로 주어먹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가입대 기간동안 진해병원에서 다시 정밀신체검사를 받고 군가도 배우고 제식교련을 했던가? 아무튼 최종합격을 하고서 9월 6일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제1연병장에서 선서를 하고 그때부터 굴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때 M-1소총과 철모는 왜 그렇게 무거웠던지
제식교련, 총검술, 도수체조, 장애물통과, 천자봉구보 뭐 그런 것들은 그저 그런대로 하겠는데 "직속상관 관직성명", "군인의길", "점검의목적", 순검의목적", "해병의맹세", "국민교육헌장" 등등, 무슨놈의 암기사항이 그렇게 많았던지, 하여튼 매일 밤, 순검시간이 되면 평시에는 좔좔 외우던 암기사항도 교관이 내앞에 서서 배를 콱찌르고, “귀관”하면 머릿속이 하예져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수시로 행해지던 구타와 오만가지 기합....
매일 저녁, 땅거미가 지면 몇시간뒤 닥쳐올 순검공포에 매일 떨어야했다.
그때까지 나는 아무데서나 담배피우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훈련소에서 처음 지급받은 화랑담배도 동료들에서 그냥 줘 바렸는데 훈련 4주차인가 그때부터 결국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휠타도 없는 화랑담배, 독한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면 몽롱한 상태가 되고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다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기상을 하고 주변청소를 하는 시간이었다,
당직교관이 갑자기 집합을 시키고는 밤새 불침번을 제대로 서지 않았다고 악을 썼다,
우리는 3중대였고 이층으로된 병사의 윗층은 5중대가 있었는데 밤새 어느 놈이 시멘트로된 배수로에 몰래 싼 오줌이 누렇게 고여 있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즐기는 듯 시커면 똥파리들이 윙윙 신나게 날고 있었다.
그때, 우리 교관은 스픈(당시 우리는 한입에 들어가기 벅찬 커다란 미제스픈을 쓰고 있었다)을 가져 오라고 하더니 우리를 한줄로 세우고 배수로에 고여있던 오줌을 한숟갈씩 강제로 떠먹였다.
워낙 배고픈 몸뚱이라서 그랬는지 별탈이 없었다.
천자봉구보는 세번했던것 같다. 처음엔 비무장, 두번째는 단독무장, 세번째는 완전무장으로 그런데 완전무장 구보를 하던날 천자봉에서 훈련소로 돌아올 때 동기 한명이 낙오를 했다. 어렵게 훈련소에 도착하자 중대장은 우리를 쉬도록 하는게 아니고 낙오했던 그 동기를 끼고 연병장을 계속돌며 뛰도록했다. 무지무지하게 힘들었던 기억이다.
덕산사격장에서 M-1사격훈련을 하던 어느날 일과후 다른 중대와 기마전을 했는데 우리가 졌다. 우리는 그냥 "졌구나"하는 아쉬움으로 끝나는줄 알았는데 중대장이 울그락 불그락 화를내며 "전투에서 진 서러움을 보여 주겠다" 고 전체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사격장 연병장에서 땅바닥에 뒹굴고 뛰고 한참 시달렸다. 그때 중대장이 김상환으로 기억된다.
사격훈련을 마치고는 완전무장으로 눈물고개를 넘어 상남보병훈련소를 행군해 갔다.
각개전투, 침투사격, 아간공격, 수류탄투척, 뭐 이런 저런 훈련을 받고 대인지뢰 폭파시범에서 교관이 지뢰를 매설하고 돌아서서 걸어 나오다가 인계철선을 건드려 갑자기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우리 훈련병들은 지뢰가 매설된 장소에서 떨어져 있었으나 완전히 엎드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그래서 지뢰를 매설하고 돌아서오던 교관은 다리 쪽에 파편을 맞아 쓰러지고 우리 훈련병중 하나는 공교롭게도 아주 작은 파편이 눈으로 날아들어 실명하고 말았다,
8주훈련이 끝나 이등병을 달고 상남에서 다시 4주 동안 보병훈련을 받은뒤 찬바람이 부는 11월말 포항에 있는 1사단으로 배치되었다.
1사단으로 배치받은 우리는 상남훈련소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동해남부선이던가? 열차편으로 이동, 초겨울 저녁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포항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하차하여 플랫홈에 정렬하자 으스스한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역전 어느 쪽에선가 군악대의 군가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세찬 바람결에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물론 우리는 잔뜩 똥기압이 들어있어서 감히 눈동자를 굴릴 형편도 못되었으니까 앞만 바라보고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착착 움직여 역광장에 일렬로 길게 세워져 있던 트럭에 승차하였다.
그 당시에는 포항시내에서 형산강을 건너고 나서부터는 비포장 도로였다.
사단으로 가는 길목의 갯벌 갈대밭을 밀어 한창 포항제철을 건설하고 있던 중이었고 주변에는 그다지 큰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바짝 쪼그라든 우리 신병들을 실은 트럭은 서서히 어둠이 젖어드는 비포장도로를 구름 같은 먼지를 날리며 거칠게 달려갔다.
아마 북문쪽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를 실은 트럭이 사단에 거의 도착할 무렵, 당시 사단 외곽담장은 군용비행장 활주로에 까는 구멍이 숭숭뚤린 PS판이었는데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
을씨년스러운 PS판 넘어 언덕위에서 실무선임들(당시 LVT대대가 북문쪽에 있었다) 이 우리가 탄 트럭행렬을 내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어대고 “이야아 - 보급품” “ㅈ뺑이 치러 오는구나” “힘내라”등 악다구니와 징그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날 밤중으로 3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까지 배치 완료됐다.
처음 실무에 배치 받고 한달간은 모든게 열외였다.
식사당번은 물론이고 작업병 차출이라도 나갈라치면 선임들이 꼼짝 못하게 잡아 두었기 때문에
교육훈련이 없는 시간에는 시선 전방 15도로 각을 잡고 침상에 단정히 앉아 있어야 했다.
당시 사단에 보병연대는 3연대, 5연대 이렇게 두개연대 뿐이었다.
2연대는 1965년도에 여단(청룡부대)으로 승격, 월남으로 파병되었고 포항에는 보병 2개연대와 포병 11연대 그리고 전차 · 공병 · 해안 · 수송 · 근무 · LVT대대가 있었고 특수교육대, 상륙전기지사령부, 국군포항병원 등이 들어서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군용비행장까지 영내에 있어서 그때 듣기로는 사단 외곽둘레가 30리가 넘는다고 했다,
병사는 단층 슬라브였는데 단열 개념이 전혀 없는 건물이어서 몹시 추웠다. 각 소대별 석유난로 1개로 난방을 했는데 난방유를 아주 적게 줘서 야간에 한시간 정도만 불을 피웠던 것 같다.
12월초 날이 갈수록 바람은 드세 지고 천하 말단 쫄병은 더욱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훈련보다 매일밤 실시되는 순검시간이 더 고통스러웠다. <순검은 그날의 최종과업>
생활실 안팎을 먼지하나 나오지 않게 쓸고 닦고, 총기는 완전 반짝반짝, 관물대는 칼같이 각을 잡고,
작업복(전투복)은 억지로 줄을 세우고 쎄무워카는 강철솔로 문질러 털을 세우고 물을 살짝 품은 다음
고무를 태워서 만든 검은 가루를 곱게 뿌려 단장했지만 그래도 지적사항을 찾아내 괴롭혔다.
날씨가 몹시 추운날 밤은 공연한 트집을 잡아 팬티바람으로 연병장 선착순을 시켜 정렬시킨 후 머리위에 찬물을 바가지로 휙휙 뿌려 악을 돋우었다. 사시나무 떨듯 떨다 실내로 들어와 옷을 입으면 정말 훈훈하기 그지 없었다.
급수상태도 영 좋지 않아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지만 물통에 물이 제대로 담겨지지 않아 우리는 아예 사용을 하지 않았고 큰일을 봐야할땐 활주로 쪽으로 나가 잡초가 무성한 개활지에 파놓은 구덩이에서 봤다. 그런데 그놈의 수세식 화장실은 소대별로 지정되어 있고 항상 반짝반짝하게 닦아놔야했고 순검시간은 물론, 주야간 당직사관이 돌아다니며 점검을 해서 변기에 물기라도 조금 남아있으면 곧바로 초비상이 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당직사관이 악기서린 목소리로 우리소대를 호출했다,
우리소대 챙기는 기수 선임이 불려갔는데 화장실내 우리소대로 지정된 변기에 기압 빠진 어떤 군사가 급히 용변을 보고는 물을 제대로 퍼붓지 않아 황금색 변찌꺼기가 남아있었고 이걸 발견한 당직사관은 우리소대 챙기는 기수에게 혓바닥으로 깨끗하게 핥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 선임이 진짜 혓바닥으로 변기를 핧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날 밤 순검이 끝나고 소등시간이 되자 챙기는 기수 밑의 기수들은 조용히 병사 밖으로 불려나가 한따까리를 하고 들어왔다.
그해 12월 중순경 해안방어를 나갔다.
원래 우리 대대 몫이 아니었는데 3연대 3대대가 김포로 올라가는 통에 우리대대가 그 쎅타를 인수 받았는가보다.
선임들은 엄청 좋아했다. 바깥공기를 마음껏 쐴수 있고, 그때만 해도 사단안에서는 여자구경을 할수 없어서 그야말로 드럼통에 치마만 둘러놔도 침을 흘릴 정도였으니까
컴컴한 새벽, 때이른 아침식사를 한후 전날밤에 미리 꾸려두었던 군장을 짊어지고 트럭에 올랐다.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해안으로 달리는 트럭 속에서 “십자성 반짝이는 이국전선에”로 시작되는 ‘남국의 향수’던가 하여간 그 당시 우리 선임들은 거의 월남을 갔다 왔기 때문에 주로 그런 노래와 저질 사가를 불러재키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동해안 도로를 내달렸다.
배치된 곳은 감포 68분초, 초소에서 감포읍 쪽으로 약 100미터 돌출지점에 등대가 서있고 분초 아래 바다 쪽으로는 인가가 몇 채 있었다.
분초장은 이정남하사로 3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한테는 정말 잘해주었던 것 같다.
68분초는 우리 말고 11연대에서 배속되어온 써치요원 2명과 캘리버50요원 2명 그리고 우리대대 본부
중대에서 배속된 81미리 요원 2명 등, 분초였지만 제법 인원이 많아 북적거렸다.
일몰시간이 되면 해안가 매복초로 나가 밀어내기식 근무를 하고 일출후 철수해서는 총기수입후 66소초까지 구보로 가서 개울가에서 세면을 하고 5갈론스페어캉에 물을 담아 분초로 돌아왔다.
초소는 물이 귀해 인근에 있는 감포등대 사택의 우물물을 신세졌는데 물속에 허연 이물질이 떠있고 염분이 섞여있어 찝찝한 맛이 났지만 그나마 수량이 부족해 우리는 매일 2키로 정도 떨어진 소초인근 까지 가서 물을 떠왔다.
한번은 모처럼 오랜만에 물을 데워 머리를 감았는데 머리 중앙에 뭔가 단단한 것이 걸려 이거 도깨비 뿔이 나려고 하는가하고 손톱으로 긁어봤더니 새카만 왕모래가 한 개 나왔다. 아마도 훈련소에서 밥먹듯 ‘꼴아박아’를 할 때 땅바닥에서 박혔던 게 그때서야 빠져나온 듯싶었다.
어느 날은 분초장이 우리를 집합시켜 놓고 바닷물 떠서 선착순을 시켰다. 초소에서 바다까지는 100미터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경사가 급한 바위사이를 뛰다 보니 내가 양손을 오므려 떠왔던 바닷물은 물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는데 선임들은 골인지점에 거의 이르러서 입안에 담았던 바닷물을 손바닥에 뱉어내어 들고 서있었다. (역시 짬밥은 달랐다)
그리고 그해 성탄절 전날이었던가, 서울에 있던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나서 많은 사람이 연기에 질식하거나 고층에서 떨어져서 죽었던 걸로 기억된다.
야간사격이 있던 날이었다.
한달에 한번인가 바다 쪽을 향해 해안초소 전 병력이 일제히 사격을 하는데 정해진 표적을 맞추는 사격이 아니라 각 분초 각 매복초가 적 침투시 완벽한 화망 구성으로 적을 섬멸하기 위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는 야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낡은 미제 파카를 착용했었는데 매복초에 도착하자 같이 나간 선임은 내가 입고 있던 파카를 벗으라고 했다 “쫄따구는 따뜻하면 기압이 빠져” “너 졸면 죽을줄 알아, 순찰 오면 깨우고” 그리고는 내가 벗은 파카를 뒤집어쓰고 매복초에 기대어 드러누웠다.
오전 취침시간이 있었지만 말단은 식기세척, 청소, 빨래 등 온갖 잡동사니 치다꺼리를 하다보면 눈 붙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24:00 정각에 조명탄이 뜨면 일제사격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눈을 부릅뜨고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까 깜박 졸았던 것 같다. 옆구리에 충격을 느껴 눈을 떠보니 누워있던 선임이 어느새 총을 들고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는 81미리 조명탄이 눈부시게 환한 빛을 내며 서서히 낙하하고 있었고 인접 매복초에서 사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내가 소지한 총기는 BAR이었는데 그놈의 총이 2차대전때 부터 썼던 총이라 무겁기만 했지 낡을 대로 낡은 거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격을 시작했는데 두발인가 나가고 약실에서 탄피가 나오지 않는다. 서둘러 탄창을 뺐다 다시 끼우고 노리쇠 후퇴 전진을 반복했지만 요지부동, 허둥대는 사이 사격끝을 알리는 조명탄이 뜨고, 그때 50발씩인가 쏴야했는데 나는 정말 망연자실했다.
잔뜩 독기 오른 선임은 나에게 옷을 몽땅 벗으라 하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라 하였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두말없이 따랐다. 어렸을 때 누군가가 겨울날 바닷물 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따뜻하다고 했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팬티바람으로 서서히 깊은 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정말 심장이 멎어버릴것 같은 냉기가 뼛속을 파고드는 거다, 바닥은 울퉁불퉁한 돌자갈, 바닷물이 목까지 차는 곳에 들어가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에 앞으로 뒤로 넘어지며 바닷물도 수없이 마셨다. 잠시 후 선임은 나오라고 하더니 자갈밭에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엠원을 삼등분해하여 엠원몸통으로 빳따를 치기 시작했다. 내기억으로는 엠원이 9.5파운드였는데 총목과 방아틀뭉치를 빼면 몇파운드가 될런가? 하여튼 한방 맞을 때 마다 개구리 뻗듯 자갈밭에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엎드려뻗쳐 또 맞고 그때 참 많이 맞았던 것 같다. 그 후 며칠간 화장실에 갈 땐 엉덩이와 팬티가 피에 엉겨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혼자 질질 짰다.
또 박□□이라는 선임은 제대말년이였었는데 후임이 끓여준 라면을 혼자 먹으면서 사제김치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우리 후임들을 ‘꼴아박아’시켜놓고 군화발로 배를 올려차는 등 가혹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그 악랄했던 선임들,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다음해 2월초 해안방어에서 철수하여 보니까 우리 사단(사단장 김연상 장군)은 세계「최강부대」기치를 내걸고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완전무장구보 한시간에 12키로 구보가 먼저 시작됐다.
정말 힘들었다. 그나마 우리 소총소대는 엠원을 들고 뛰었지만 본부중대 81미리는 사수, 부사수, 탄약수가 포다리(삼각대), 포열, 포판을 각각 나누어 메고 뛰어야했으니 오죽 했을까
구보를 하고나면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얼굴이 허연 소금으로 덮였다.
비포장 자갈길을 계속 뛰다 보니 워카바닥이 닳아 못이 발바닥을 찔러대고 워카뒤축은 바깥쪽으로 형편없이 닳아 중대별로 각자 워카를 모아 근무대대로 보내 왼쪽과 오른쪽 뒤축을 맞바꿔 달아 신고 다니는 촌극도 벌어졌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출발해서 중간지점쯤 뛰다보면 숨이차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두어달 지나니까 그런대로 뛸만했다.
사실 낮에 훈련을 받는 건 할만 했다. 그보다 나에게 힘든 건 야간 경계근무였다. 말단이라 초번과 말번은 꿈도 꾸지 못했고 새벽 두시부터 근무면 15분전 교대에 맞추기 위해 30분전에 일어나 단독무장을 하고 외곽초소에 나가서 두시간 근무를 서고 돌아오면 네시가 넘고 잠깐 눈좀 붙일려면 기상시간이 되고 말았으니까 본래 잠이 많은 나에게는 그게 고통스러웠다.
음력설날이었다, 그때는 공휴가 아니었지만 떡국이 나왔다. 대대식당에는 중대별, 소대별 식탁이 지정되어 있었는데 나는 나보다 몇 기수 위 선임 서넛과 함께 식사당번이 되어 식기를 챙겨들고 대대식당에 들어설 때였다. 그 당시 식기는 후라이팬으로 불리던 미제반합에 밥을 담고, 수통에 끼워 다니던 캔컵에 국을, 반합뚜껑에 김치나부랭이를 담아 먹던 때였다. 좀 띨띨한 선임이 식탁위에 식기를 내려놓다가 식당바닥에 떨어트렸다.
“어떤 놈이야?” 식당 안에서 잔뜩 군기를 잡고 있던 대대선임하사가 독살스러운 눈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식기를 떨어트린 선임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엉거주춤 뒤쪽에 서있었고, 선임이 떨어트린 식기를 주어 올리던 내가 일어서 부동자세를 취하자 대대선임하사는 나를 불러서 곧바로 내뺨을 사정없이 쳐올렸다.
“제가 아닙니다.' 라는 말도 못하고 음력 정월 초하룻날부터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오르도록 뺨을 맞았다. 그때 식기를 떨어트렸던 그 띨띨한 선임이 정말 야속했다.
2월중순경, 대대T.T.T를 나가서는 산중턱에 있는 숙영지를 정하고 그와 멀리 떨어진 개울가 에 설치한 대대야전취사장에서 분대별로 밥을 타왔는데 마땅한 그릇이 없어 철모를 화이바와 분리해 냄새나는 철모에 밥을 담고 또 다른 철모에 국을 담아 산비탈을 오르다가 분대원중 하나가 들고가던 철모가 끈이 떨어지면서 밥을 몽땅 쏟아버려 허기에 시달리기도 했고, 개인텐트안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수통의 물이 꽁꽁얼어있었던 기억도 난다.
오끼나와주둔 미해병대 수색대가 원정훈련을 와서 우리대대와 상륙전기지사령부 중간쯤에 있는 ‘하선망교장’옆에 텐트를 치고 숙영하고 있었다.
그네들은 사단내에 있는 활주로에서 자그마한 수송기를 이용, 낙하훈련도 하고 , 해골마크가 들어있는 군기를 들고 구보도 했다. 어떨 땐 우리부대가 완전무장으로 구보하면서 비무장으로 구보하던 그들을 추월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들의 숙영지에는 C레이션이 노천에 그대로 쌓여있었다. 그걸 그냥 두고 볼 우리가 아니었다. 나는 참가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 소대 선임 몇몇이 은밀하게 접근하여 미해병대의 C레이션을 ‘김바이’ 했다. 그런데 C레이션을 으슥한 곳에서 처분하면서 그중 한명이 은박지에 든 초콜릿 같은 것을 까서 냉큼 입안에 넣었는데 이게 영 맛이 아니더라고 했다. 밝은 곳에서 포장지를 읽어보니 콤포로션(고체연로)이었다고, 한 동안 그 선임은 우리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흉몽대길이라고 하였던가?
나는 솔직히 ‘해몽’같은 것은 미신으로 간주하고 믿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내게 현실로 닥쳤다.
그해봄 일병을 달고 군대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날도 연일 계속되는 훈련에 지쳐 물먹은 솜처럼 깊은 잠에 떨어졌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입대 이후 좀체 집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꿈속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내가 관을 붙잡고 한없이 흐느껴 울었는데 그때 옆자리에서 자던 선임이 깨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마나 울었는지 베개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 중대는 야외훈련을 나갔다. 양포 쪽으로 가다가 벽암지교육장 못미처서「참새미교장」이라는 훈련장으로 행군해 갔는데 도로에서 벗어나 비탈진 산길을 오를 때쯤 뒤쪽에서 소대선임하사가 나를 불렀다. “넌 나하고 물좀떠서 올라가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까라면 까야 하니까 두말없이 선임하사를 따라 되돌아 내려갔다.
“저기 저사람이 누구냐? " 도로가 보이는 길목에 이르러 선임하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산아래 약 100미터쯤 떨어진 길가에서 감색중절모에 검정색 오바차림의 노인이 나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아버지가 맞나? 좋아, 내려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한시간내로 올라와“선임하사의 배려에 감사하며 잽싸게 뛰어 내려갔다.
일년만에 만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도로변에 있는 구멍가게의 쪽방을 빌려 들어가셨다.
무단가출, 그리고 부모 몰래 해병대 입대, 훈련소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보낸 사복과 훈련소 중대장의 가정통신문을 받으시고 부모님은 ”이놈이 죽진 않았구나! “ 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집에 한통의 편지도 쓰지 않았었다. 당시 청룡부대는 월남에서 철수했지만 월남전이 끝난때는 아니었다. 허구헌날 애를 태우던 부모님은 해병대사령부까지 찾아가 자식의 소재를 확인하고 아버지 혼자 포항까지 찾아 오셨는데 밤늦게 도착해 여관에서 주무시고 아침 일찍 면회신청을 했더니 야외훈련을 나갔다고해 버스를 타고 훈련장까지 찾아오셨던 거였다.
연일 훈련으로 새카맣고 초췌한 자식을 어루만지시며 한없이 눈물 흘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참으로 큰 불효를 저질렀었다.
‘72년 4월말경, 연대 상륙훈련이 있었다.
나를 비롯한 밑에 기수들은 은근히 좋아했다. 왜냐하면 일단 야외훈련 기간중에는 순검을 받지 않아도 되고 또 잠시나마 선임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으니
원래 계획은 포항에서 미해군 항공모함을 타고 동해상으로 나가 미군헬기를 이용, 양남해안에 상륙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어떤 사유에서인지 훈련계획이 변경되어 우리는 사단에서부터 완전무장으로 양남까지 행군으로 이동했다. 행군도중 감포쯤 가고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해 우리는 모두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걸어갔는데 얼마나 찌던지, 공기가 통하지 않는 우의속은 열기와 땀으로 찜통이 되어 차라리 우의를 벗고 그냥 비를 맞으며 가는게 훨씬 나을 듯싶었다.
양남해안에서부터 경주 쪽으로 공격대형을 유지하여 산을 몇 개 넘고 그날 오후, 잡목과 칡넝쿨로 뒤엉킨 산골짜기를 헤치고 나가다가 큰 송아지만한 노루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마도 밀렵꾼이 설치해둔 올가미에 걸려 죽은 것 같았는데 역한 냄새가 나고 파리떼가 날아다니는 것으로 봐서 죽은 지 며칠된 것으로 보였다. 그날 밤 숙영지에서 선임 두어 명이 깜깜한 산골짜기를 더듬어 되돌아가 낮에 봤던 그 죽은 노루의 뒷다리 부분을 짤라와서는 개인텐트안에서 비상식량 취사용 고체연료로 불을 피워 삶아 먹었는데, 한참 배고플 때였지만 나는 비위가 약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상륙훈련때 개인별로 지급받은 비상식량은 네모난 기름종이 봉투 속에 찐쌀 3봉지, 고체연료 한통, 고추장 한통이 들어있었는데 찐쌀은 보존기간이 오래되어 전혀 찰기가 없고 맛이 하나도 없었지만 유일한 에너지공급원이었으므로 매끼 남기지 않고 퍼먹었다.
훈련중 우리 중대에는 항공폭격을 유도하는 미해병대의 엥그리코요원들이 배속되었다. 중위 한명, 그리고 사병 2명이었다. 그들은 무전기 밑에 C-레이션 같은 것이 들어있는 작은 배낭(하배낭)을 달아 짊어지고 다녔는데 연결고리를 엉성하게 결속해서 걸을 때마다 배낭이 유난히 키가 큰 친구들의 엉덩이쯤에서 덜렁거리는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기압 빠진 군대라며 실실 웃었는데, 그들은 우리 중대장이 올라오자 깍듯이 경례를 했고, 그리고는 그들끼리 따로 떨어져 휴식을 취하고는 한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야전삽을 빌려달란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응아를 했는데 그걸 땅속에 파묻으려니 자기네들은 야전삽을 휴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빌려달라는 거였다. 그들의 행동에서 군대를 외양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야간공격이 끝나면 편편한 곳을 골라 개인텐트을 치고 잠시 쉬었는데 청음초를 하필이면 공동묘지 근처 같은 곳에다 세웠다.
훈련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할 때는 수송대대에서 보내온 트럭을 타고 돌아왔다. 훈련 내내 완전무장으로 산을 오르내리며 뒹굴고, 쉴틈없이 이동하느라고 훈련첫날부터 끝날 때까지 워카를 한번도 못 벗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다시 살벌한 영내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별로였다.
또다시 시작된 무장구보,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숙달되어 뛸만했는데 새로 전입온 신임소위 기리고 신임하사들, 대대연병장에서 출발하기 전까지는 각을 잡고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늠름한 폼이었지만 막상 출발하여 5키로 정도를 뛰다보면 목이 뒤로 넘어가고 당장 쓰러질 듯 헐떡거리며 간신히 쫒아 노는 모습이 정말 애처로웠다.
하기야 우리도 12키로 구보를 처음 시작할 때 그랬으니까
그해 5월초, 저격병교육을 받기위해 특교대에 입교했다.
4주였던가? 정말이지 괜찮은 교육이었다. 교육대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엠원총을 메고 250발들이 탄통이던가? 그걸 각자 한통씩 들고 오천사격장까지 도보로 이동, 사선아래에서 간단한 이론교육을 받은 뒤에는 하루 종일 마음껏 총을 쏠수 있었으니까
저격병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니 우리 중대는 칠포로 해안방어를 나가 있었다.
중대에서 혼자서 따로고 배치받은곳이 포항에서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 있는 3분초였던가? 하여튼 그 초소에서도 최 말단으로 한 열흘정도 뺑뺑이를 돌고 있는데, 저격병교육을 이수하였다는 것 하나로 사단기능사격대회 선수로 선발되어 대대본부로 들어가 합숙훈련을 했다.
포항제철 건설현장안에 있던 대대본부 옆 모래사장에 사면을 모래로 높게 둑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25야드 표적사격 연습을 했다.
가끔 휴식시간에는 방파제로 나가 야전삽으로 바위틈에 붙어있는 자연산 굴을 따서 바닷물에 그냥 헹구어 먹었는데 맛이 그만이었다.
사격대회에서는 M-1소총을 바닥에 깔린 판초우의 위에 3등분해 해놓고 사격개시 신호가 떨어지면 제한된 시간 내에 신속하게 총기를 결합, 삽탄하여 사격하는 것으로 표적지 명중률보다 즉각 대응능력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우리대대에서 연습할 때는 득점위주로만 사격연습을 했기 때문에 총기를 결합할 때 너무 긴장하고 당황하여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한 것이 정말 아쉬웠다.
칠포는 감포와 달리 모래사장이 비교적 넓고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모래사장 매복초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다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달려와 모래와 자갈을 때리며 부서지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서 자신이 지금 밑바닥을 기고있는 말단쫄병이라는 현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파도가 아주 거친 날은 바닷가로 미역 같은 것이 떠밀려 올때도 있어서 우리는 가끔 이런것들을 주어다가 부식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한날은 무슨 일로 선임 몇 명과 함께 중대본부에 들어가기 위해 부식추진차량 적재함에 타고 가던 중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좁고 덜컹거리는 비포장 자갈길이었지만 초여름, 상쾌한 공기를 머금고 주변을 살피며 가자니 내륙 쪽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제법 큰개울이 멀리 보였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빨래거리를 함지박에 가득 담아 이고 재잘거리며 가는 아가씨들도 보였다. 트럭이 가까이 지나칠 때 그 아가씨들은 먼지를 피하려고 길 가장자리에 멈춰 돌아서 있는데, 짓궂은 선임하나가 트럭위에서 재빨리 손을 뻗어 아가씨들의 빨래거리 하나를 집어 들고는 “헤이 언니들아, 이기 뭐꼬” 소리치며 흔들었다.
“이 ×같은 ××들” “야 이×할 ×들아” 그 아가씨들, 정말 엄청난 욕설과 팔뚝질을 해가며 우리가 탄 차량을 쫒아왔다. 우리는 한참 낄낄거리다가 빨래꺼리를 멀리 던져버렸다.
그해 여름 느닷없이 진해 교육기지사령부로 전출명령이 떨어졌다.
아니 이게 웬일?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후방으로 전출, 어쨌든 그놈의 우라질 무장구보에서 해방되었으니 신났다. 사단에서는 각 대대별 공수 · 유격 · 수색대대로 특기를 부여받고 바야흐르 생고생이 시작될 즈음이었으니까
나중에 같은 중대에 있던 동기에게 들었더니 그해 여름 내내 수색훈련을 받는다고 오물투성이 하수도 시궁창을 기고,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똥통 속에도 들어가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신병훈련을 받을 때, 우리 모두가 “진해 쪽을 보고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치를 떨었는데 다시 진해를 가게 되니까 착잡한 마음 금할수 없었다.
교육기지에서 배치 받은 부서는 교재처였고, 그 부서의 주임무는 교육훈련에 소요되는 각종 교재의 제작 · 지원이었다.
처장은 고참 중령이었고 미군 전술교본을 번역하는 해사출신 소령 두명, 행정총괄 대위 한명, 그 아래 중사 한명, 하사 2명, 병은 모두 7명이었던 것 같고 그리고 번역, 타자, 차트, 도서관리, 인쇄, 시청각교재, 전기 등 업무에 종사하는 군속이 약 20여명 정도 되었다.
군속중에 ‘미스배’라는 타이피스트가 있었는데 별명이 ‘10미터 미인’이었다.
눈, 코, 입이 정말 선명하고 보기 드물게 우아한 몸매를 가진 그런대로 괜찮은 아가씨였는데, 내가 벽암지(유격)훈련을 받고 귀대했던 날, 찌든 냄새를 벗겨내려고 <승파관>세면장에서 열심히 샤워를 하고 있을때 그 ‘미스배’가 급하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가 깜짝 놀라 도망가던 일도 기억 난다.
교재처에서 관리하는 <승파관>은 한 번에 약 300명 정도 입장할 수 있는 극장식 건물로 실내 전면에 무대, 중앙 바닥에는 원산지형을 3000분의 1로 정교하게 축소해 제작한 사판위에 모형 함정 · 항공기를 작동시켜 상륙작전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되어있고, 좌우로 관람석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건물을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아 항상 청결을 유지하였고 외벽 유리창은 봄가을로 빨간색에서, 노란색, 그러다가 다시 파란페인트로 덧칠하곤 해서 나중에는 유리보다 페인트칠이 더 두꺼울 정도였다.
<승파관> 옆에는 일제시대때 파놓은 방공호가 4개 있었다.
반 아취형으로 높이가 약 2미터, 수평으로 10미터 정도 되는 콘크리트 구조였는데 그중 하나는 탄약고로, 하나는 화생방교육장, 나머지 2개는 민방공훈련때 본부대대 대피소로 사용했다.
문제는 화생방교육장이었다.
기본교육과정의 간후생, 하후생, 신병들을 이 방공호에 몰아넣고 최루탄을 터트려 가스맛을 보여주는 시설이었는데 바닥에는 항상 지저분한 물이 고여 있어 질퍽거렸고, 특히 여름철에는 여기에다 모기들이 무수히 알을 낳아 원기왕성하게 번식하고 있었다.
모기박멸 대책으로 방공호 안에다 주기적으로 오일 T.T.T를 살포했는데 마땅한 도구가 없어 5갤론통에 들어있는 미끈미끈한 T.T.T액을 손으로 떠서 방공호 구석구석에 뿌리곤 수돗물에 손을 씻었다. 독성물질에 대한 경계심은 있었지만 크게 우려하지 않았었다.
매일 아침 과업정렬은 사령부 본관 국기게양대앞에서 했는데 본부대대 전원이 집합해서 국기게양은 경비중대 3소대인 의장대 대원들이 했다.
교육기지에서는 항상 단정한 복장을 요구하서 군복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려 입어야했다
당시에는 군복이 면으로 되어있어 풀을 먹여 다려야만 줄이 섰고 영내에 민간인이 운영하는 세탁소가 있었지만 졸병처지에 매번 세탁소 신세를 지기에는 벅찼다.
혼방복지는 1973년도에 보급되었던 것 같은데 그 군복은 세탁을 해서 건조시키면 허옇게 탈색되어 버려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바지 구김살이 보이지 않도록 항상 링을 차야했는데 후임기수들은 요대를 링둘레 정도로 짤라 바지 밑단에 말아 접고 그 안에 링을 끼워 넣었는데 바지하단 균형이 잘 잡히지 않을뿐더러 한참 뛰다보면 링이 빠져나와 워카발목에서 철거덕거리는 것이 꼴불견이었지만 선임들은 바지 안에 링을 끼우고 바지밑단을 워커 속에 접어 넣은 다음, 워카끈만 졸라매어도 자연스럽게 균형이 잡히던 것이 신통했다.
날이가고 달이가고, 선임들이 하나 둘 전역하는데 결원보충이 되지 않아 상병을 달고서도 왕자(王字)식당 식사당번을 면하지 못하다 한참 지나서 1기후임인 기생오라버니 같이 생긴 오세○, 그리고 가톨릭의대를 중퇴하고 입대한 10기정도 아래인 신석○라는 후임이 전입 와서 겨우 식사당번을 면할 수 있었다.
본부대대장은 안상○ 중령이었는데 늘씬한 키에 반백의 머리, 찰스 브론슨을 닳은 멋쟁이로 병과는 포병이라고 했다.
대대장이 새로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 날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대대본부앞 공터에다 본부중대병력 전병력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는 중대선임하사를 앞으로 불러내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직접 빳따를 쳤다.
그런데 빳따를 맞는 선임하사는 왜 그렇게 엄살을 심하던지 곡괭이 자루가 엉덩이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방 죽을 것 같은 “아이 고” 비명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뒹굴었다.
대대본부 앞은 3면이 훤하게 노출되어 있어 우리뿐 아니라 사령부에 근무하는 많은 군속들의 눈에도 쉽게 띄는 장소인데 그런 곳에서 근엄하신 대대장이 직접 곡괭이 자루를 휘두르는 것도 그렇고, 기왕 맞는거 이 앙다물고 묵묵하게 맞아주면 그런대로 넘어가겠는데 채신머리없게 땅바닥에 나뒹구는 선임하사님 모양새 정말 좋지 않았다,
본부대대 각 부서별로 약 1주간씩 돌아가면서 탄약고근무를 섰는데 우리부서 담당이 되어 내가 근무를 서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었는지 사령부 참모들께서 기지내 구석구석을 순시하며 내가 근무를 서고 있는 탄약고까지 왔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발생하였다. 탄약고 근무를 서면서 휴대하는 엠원총을 근무교대할 때 현지에서 그대로 인계인수하다보니 며칠이 지나도록 제대로 딲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도 맞아 총구 쪽으로 시뻘건 녹이 슬어 있는 상태였는데 병기참모가 나에게로 다가와서 “총좀 줘바” 가슴이 철렁했다.
나혼자 깨지는 것은 괜찮은데 우리부서 그리고 선임들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생각하니 죽을 맛이었다.
“초병은 어느 누구에게도 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크게 외쳤다. “햐 이놈 봐라” 병기참모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그때 다른 참모들이 껄껄 웃으며 “갑시다.” 병기참모는 잔뜩 못마땅해 했지만 다른 참모들의 뒤를 따라갔다. “후유”
11월 중순경
나보다 1기후임인 오세○과 함께 상남으로 공수교육을 받으러 같다.
PT체조, 구보, 기합 위주였고 접지, 모형문탈출, 그리고 마지막 날 낙타워를 뛰었던가? 하여튼 지상훈련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첫날 훈련을 마치고 숙영시설인 콘셋트로 들어가자 엄청 써늘했다. 침대는 충분했지만 완전무장에 달고간 모포가 달랑 두 장뿐인지라 최대한 열효율을 높인답시고 작업복을 입은 채로 오세○과 한 침대에서 취침했는데, 잠결에 등쪽으로 엄청 따뜻한 느낌이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피곤한 상태라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게 웬일? 작업복 등쪽이 홍건하게 젖어있고 오세○의 바지도 젖어있었다.
젠장, 오세○ 이자식이 침대에서 오줌을 싼 거다.
이 친구는 백령도에서 근무할 때 빳다를 잘못 맞은 후유증으로 심하게 피곤한 상태가 되면 괄약근 조절이 되지 않아 오줌이 그대로 샌다는 것이다. “이수병님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때는 선임을 수병님으로 호칭, 그 후 계속 비밀을 지켜줬는데 오늘 이글을 통해 까발리게 되어 미안!)
갈아입을 옷도 없어 오줌에 젖은 작업복 그대로 공수훈련장으로 나가 오전 내내 뛰고, 뒹굴고서 흙먼지를 털어내니까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1973년 여름, 전투수영, 교육기지에서부터 완전무장으로 출발, 대발령을 넘어 웅동까지 행군하여 여름방학 중인 초등학교 운동장에 대형천막으로 숙영시설을 만들어 놓은 임시교육장에 도착, 3박 4일인가(???) 훈련을 받았는데,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PT체조만 하다가 막상 바닷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시간은 두시간정도 밖에 안됐던 것 같다.
PT체조를 하면서 교관인가 조교가 모두 운동장바닥에 들어눞게한후 워카발로 배를 밝고 지나갔는데 배에 힘을 잔뜩 줘서 그랬는지 괜찮았다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던 밤이었다. 완존히 해방감에 들떠 우리는 신나게 술판을 벌이고 나서는 불침번도 제대로 서지 않고 골아 떨어져 잔 것 같은데 갑자기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깨어났다.
영선대장이었던가? 소령이 임시 교육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막사를 돌아보다가 모두 골아 떨어져 자는 꼴을 보고 분기가 탱천하신거다. 질척질척한 운동장에다 모두 집합시켜 놓고 한명씩 앞으로 나오게 해서 천막지주대로 직접 빳다를 쳤다. 우리 모두 지은 죄가 있어 달갑게 맞았다.
(일개소대 정도였으니까 맞는 우리보다 때리던 교육대장님이 엄청 더 힘드셨을거라고 생각됨)
1973년 늦여름, 해군해병통합 소식이 들려왔다.
세상에 이런일이...
모두가 분노와 허탈감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늦여름 더위 속에서 인계인수를 위한 준비로 모든 기물의 목록을 먹지를 대고 5장씩이었던가? 밤을 새워 작성했다.
교육기지를 떠나기 전날 밤 정말 살벌했다.
모두 경화동으로 뛰쳐나가 주머니를 털어 안주도 없는 깡소주를 퍼마시고 밤새도록 고래 고래 악을 쓰며 울분을 토했다.
다음날 오전, 통제부역에서 우리를 실은 임시열차가 출발하려고 할 때, 교육기지사령관 이동호 장군이 몇몇 참모를 대동하고 플렛홈에 나와서 말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웬지 울컥한 마음, 금할수 없었다.
우리는 '곤조가' '성냥공장 아가씨' 등 저질 싸가를 미친듯이 불러제끼며 포항으로 향했다.
포항사단에 도착해서 새로 창설되는 7연대 3대대로 배치 받았다.
1대대, 2대대는 2연대와 3연대에서 차출된 병력 위주로 편성하였고 3대대는 상륙전기지, 교육기지가 해체되면서 거기에 소속되었던 병력을 위주로 편성되었는데, 보병대대였지만 공병, 군수, 전차병과까지 상당수 있었다.
해군으로 통합되는 바람에 전후방 각처에서 근무하던 인원을 긁어모아 급조한 부대이다 보니 의기소침한 분위기와 반면 각자 전에 근무하던 부대의 정서가 아직 남아있어 뒤죽박죽으로 골치 아픈 일도 많았다.
하루는 사단장 이동룡 장군이 부대순시를 왔다.
그때까지 우리는 개인화기조차 지급받지 못한 채, 하루에 몇 번씩이나 인원점검을 받으며 어정쩡하게 보내고 있었다.
사단장이 참모들을 대동하고 생활실을 순시하는데도 개의치 않고 2층 침상에서 뒹굴고 있고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등 완전히 기압 빠진 행동을 하다가 사단장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다시 훈련소 생활을 시작하는 신병들처럼 제식교련, 총검술, 분대전술 등 기본훈련을 반복 실시하며 빡세게 돌아갔다.
나는 처음 10중대에 편성되었다가 얼마 후 11중대로 갔는데 그건 내가 별나서 아니라 중대별로 적절하게 기수를 조정하기 위한 조치였던것 같다.
11중대장은 前 상륙전기지 의장대장이었는데 11중대 3소대 역시 前 상륙전기지 의장대 요원들로 편성되어 평상시에는 소총소대로 뛰다가 사단에 행사가 있을 때는 행사복으로 갈아입고 의장대 역할을 했다.
의장대장 출신인 중대장은 제식교련때 중대원들에게 이동간의 구령을 “하낫” “둘“이 아닌 “촤” “ 후아” 로 우로어깨총에서는 총의 각도를 의장대처럼 90도로 세우고 팔도 눈높이까지 흔들도록 요구했다.
前 상륙전기지의 연대이발소에는 아주 오래전 탈영했다가 다시 잡혀 들어와 나머지 군대생활을 하고 있는 상당히 늙수그레한 일병이 있었는데, 여고생이된 딸도 있다고 했다.
27개월째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왜 그렇게 배가 고팠는지
1일 규정량 백미 576그람, 압맥 252그람, 된장 90그람, 고추장 10그람, 그리고 등등……. 과연 그때 우리가 규정량대로 먹고도 그렇게 배가 고팠을까?
나이 들어 지금은 먹는게 귀찮고 원수덩어리 여편네가 신통치 않은 반찬 내놓으면 숟갈을 던지고 싶지만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반찬 없이 밥한그릇쯤 뚝딱 해치울 수 있다. (정말임)
연대 FTX때는 말년에 소대무전병이 되어 PRC-10(진공관식)무전기를 메고 돌아다녔는데 이틀째 되는 날 저녁이었던가? 은밀하게 무전병을 차출 했다. 처음 나를 찍었다가 다른 무전병으로 교체해 데리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오후 포반(60미리)친구들이 공갈포를 쏘고서는 다음 목표로 급히 이동하면서 깜빡 그 자리에 엠원총을 놔두고 갔다가 저녁 무렵에야 확인하고 나서 조용히 총을 찾으러 가기 위해 무전병을 차출했던 거였는데 그 팀은 어두워진 시골길을 찦차로 이동하면서 개울가에 임시로 쌓아놓은 모래 뚝방을 도로로 착각하고 그대로 달리다 차가 뒤집혀 개울가에 처박히면서 부중대장이 머리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해 11월말경 김종필 국무총리가 사단을 방문해 우리는 완전무장으로 활주로에 도열해서 사열을 받았고, 그리고 12월 초순경에는 당시 해군참모총장이던 김규섭 대장이 순시(격려)차 방문하여 활주로에서 사열을 받았는데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사열이 진행되는 도중,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기수들이 들고 있던 군기가 팽팽하게 펄럭이다가 해군기였던가(?) 깃대 하나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기수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군기를 집어 들고 간신히 사열은 마쳤지만 정말 찝찝한 일이었다.
1974년 1월 15일 사단창설기념일 체육대회를 앞두고 대대무장구보선수로 차출되었는데 대대에서 선발한 1개소대 규모의 무장구보팀은 약 1주간 따로 합숙하며 먹고 뛰고를 반복했다. 한날은 저녁때 특식이랍시고 큰 식통에 돼지고기가 푸짐하게 나왔는데 이놈의 돼지고기가 살코기는 어디로 가고 몽땅 비계뿐, 그나마 언제 삶았는지 식어빠져 기름덩어리 상태라 모두가 불평하며 버리는 게 아까워 억지로 퍼먹었다. 그리고는 밤새 설사를 하고…….
무장구보 시합 때에는 좀 더 속도를 낼수 있었지만 몇몇 약골 때문에 팀웍이 맞지 않아 등위권안에도 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1월말, QRF에 편성되어 진해로 갔다.
황량하던 포항에서 다시 진해로 가니 겨울임에도 아늑한 분위기였다.
질서정연하되 살벌하지 않을뿐더러 통제부 식당에서 민간인들이 조리해주는 식사를 하니 마치 사제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탄약고에 보관되어있던 탄약들을 점검하다 보니까 수류탄 한 개가 안전핀이 심하게 부식되어있는 상태로 금방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염분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수류탄 안전핀에 철사를 감아 묶어 다시 그대로 보관했는데 찜찜했다.
배를 타기전, 우리는 장기간 함상생활에 대비하여 자질구레한 일상용품을 구입했는데, 당포회관에서 뽀빠이(라면과자)를 달라고 하자 상당히 예쁜 소녀(그때는 여자만 보면 무조건 예뻤는지도 모른다)가 미소를 지으며 빨간봉투에 담긴 것만 골라주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85함(웅포함이던가?)을 탔다.
3천톤급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우리해군에서는 구축함급 다음인 호위구축함이라고 하였으며 2차대전 때는 미 해군이 고속수송함으로 사용하던 군함이었다고 했다.
남해를 작전권으로 20여 일간 함상생활을 했는데 함교위에서의 견시근무와 후갑판에서 태권도, 훈련전투배치 등이 주요 일과였고 추자도에도 한번 상륙하여 지형정찰을 했다.
파도가 심할 때는 롤링 피칭 때문에 식탁위에 있던 국이 쏟아질 정도였지만 파도가 없는 날에는 걷고 싶은 충동이 날 정도로 잔잔하게 햇볕에 반짝이는 해면이 무척 아름다웠다.
웅포함이 작전을 교대하고 들어온 날, 그해 2월 22일 YTL사건이 발생했다.
해군 159기 훈련병들이 탔던 YTL이 통영앞 바다에서 침몰되어 159명이 순직한 사건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배에서 내려 숙영지 정리정돈을 하고나서 오랜만에 앞산 부두 쪽으로 구보를 하다 보니 우리가 타고 돌아왔던 웅포함이 긴급출항을 하고 통제부 안이 술렁거렸다.
그날 저녁 해군훈련소로 쓰던 병사에 영안실이 마련되었고 속속 인양되어온 훈련병들의 시신을 안치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기동타격대 임무가 부여되어 총없는 단독무장으로 대기하다가 유가족들이 통제부로 몰려오면 뛰쳐나가 정문앞에서 몸으로 막는 역할을 해야 했다.
아마도 열흘정도 민간 잠수사까지 동원해 시신인양 작업을 했던것 같은데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빨라 많은 시일이 걸렸고 겨울바다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3월초 인양한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 육군 영현부대에서 군용트럭뒤에 굴뚝이 높다랗게 달려있는 시커먼 추레라를 달고 왔다. 아마 열대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육군 영현부대 사병들과 우리는 같은 식당 바로 옆 식탁에서 식사를 했는데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을 보며 그다지 좋은 병과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결식을 앞두고 UDT교육대쪽 외진 곳에서 밤새도록 화장을 했는데 우리 숙영시설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실내에 까지 화장하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영결식은 해군교육단(舊해병교육지기)에서 거행했는데 우리는 영결식장 밖에서 기동타격대로 대기했다.
공교롭게도 159기에 159명이 순직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3월 중순경 다시 배를 탔다
83함(충남함으로 기억)이었는데 서해북쪽 백령도 근해에서 주로 작전을 했던 것 같다.
작전기간을 한달로 예정하고 일용품을 지급받았고 그때 화랑담배도 15갑씩(2일1갑)을 지급 받았는데 작전기간이 연장되면서 모두 담배가 다떨어져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매일 쓸고 닦는 함상이라 어느 구석에서도 담배꽁초를 주울만한데도 없고 더군다나 해군은 우리처럼 흡연자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담배를 빌릴만한 곳도 없어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정말 난감했는데, 다행히도 마음씨 좋은 해군하사관에게서 시가 한 개를 얻었다. 그 하사관은 군함을 인수하기 위해 미국엘 갔다오면서 사왔던 시가를 가지고 있다가 우리들의 딱한 사정을 보고 선심을 쓴거였다. 우리는 그 시가를 선임부터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빨았는데 며칠 동안 담배를 굶다가 한 모금 빠니 팽돌아 그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였다.
매일 '견시근무'와 후갑판에서 '태권도', 그리고 ‘훈련전투배치’시에는 5인치포 탄약고로 뛰어 내려가 포탄송출 훈련도 했다.
가끔 적정상황에 따라 전투태세 돌입도 하고, 서해를 통과하는 여러나라 화물선들을 봤다.
5월초, 작전이 끝나 진해로 돌아왔다. 배를 탈 땐 천자봉 정상에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었는데 40여 일간 함상생활만 하다가 신록에 뒤덮인 진해항으로 들어가자 정말 흙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지는 듯 했다.
다시 포항으로 복귀해보니 우리부대는 해안방어를 나가있었다.
양포에 있는 중대본부로 배치를 받았는데 중대장이 신임하사들은 중대본부 주변의 매복초 근무를 시키고 나같이 말년병장들은 해안순찰을 돌도록 했다.
양포에서 구룡포쪽으로 순찰을 돌았는데 ‘모포리’라는 곳은 고정간첩이 산위에서 바다로 신호를 보낸다는 말이 있어서 우리는 순찰을 돌때 엠원에 실탄을 삽탄하고 언제라도 쏠 수 있는 자세로 조심스럽게 마을을 통과했다.
한날 밤에는 동기와 둘이서 해안가 외진 곳에 있는 절벽쪽으로 순찰을 돌고 있는데 생선 타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나서 절벽 아래를 살펴보니 통나무를 잔뜩 쌓아놓고 불을 피우고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몰랐지만 한밤중 바닷가 외진 곳에서 화장하는 것을 보니 섬뜩했다.
그 해 6월초쯤 그날 밤도 중대본부에서 상당히 원거리를 순찰하고 있는데 중대본부가 있는 양포쪽 하늘이 훤했다. 가까운 분초로 뛰어가서 확인해보니 중대본부쪽으로 적이 침투하여 교전중이란다. “아이구 이런 젠장, 올 것이 왔구나!” 우리는 헐레벌떡 중대본부를 향해 뛰었다. 그런데 우리가 중대본부에 도착해보니 이미 상황은 끝났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내용인즉 중대본부앞 매복초에서 근무하던 신임하사 둘이 이빨을 까며 노닥거리다가 문득 바다 쪽을 바라보니 시커먼 고무보트가 넘실거리는 파도에 흔들리며 해안가로 다가오는 것으로 보여서 숨이 턱에 닿도록 중대장한테 뛰어가 보고했고, 중대장은 그 물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사격명령을 내려 실탄사격을 퍼붓고 인근에 있던 106미리까지 가세하여 엄청나게 퍼부었는데 지원사격을 요청해서 4.2인치 조명탄을 띄우고 자세히 살펴보니 바다속에 있는 시커먼 바위가 밀려오는 파도에 잠겼다가 보였다 하는 것이 마치 고무보트가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마구 사격하게 된 창피스러운 해프닝이었다.
순찰을 돌고 새벽녘에 귀대할 땐 탄낭에 들어있던 실탄크립을 꺼내 딴띠에 꽂고 농민들이 애써 키워놓은 양파를 워카발로 툭차서 튀어나온 것을 탄낭집에 넣고 와서는 식사 때 반찬으로 추가하는 민폐도 끼쳤다.(39년전 일이지만 정말 죄송)
보존기간이 한참 경과되어 폐기처분해야할 비상식량 찐쌀로 해준 밥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먹었는데 해안경계용으로 키우고 있던 세퍼트(훈련을 받지 않고 주인이 자주 바뀌는 통에 똥개화)는 그 밥을 쳐다보지도 않고, 우리도 감히 못 먹는 고기를 넣어주어야만 깐작깐작 고기만 건져먹고는 개집으로 기어들어가 디비져 잤다. 우리는 개도 안 먹는 밥을 먹고 개보다 엄청 열심히 뛰었다.
중대본부에도 야간경계를 하는 방위병들이 있었는데, 통조림공장 처녀귀신 이야기, 머구리가 바다 속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시신을 봤다는 이야기, 자기 작은할아버지가 마을을 갔다 오다가 도깨비불에 홀려서 돌아가셨다는 등 등 그 지방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아주 실감나게 구사하던 이빨 좋은 방위도 있었다.
해질 무렵, 포구에서 조그마한 배가 널따랗게 원을 돌며 그물을 쳐놓고 마을사람 남녀노소 모두 나와 그물줄을 잡아당겨서 그물속에 잡힌 잡고기들을 나누어 가지는 “후리” 아마 불법행위였을 것이리라,
저녁때 중대본부에 출근하는 방위병들이 그 고기를 한 바케스씩 담아 와서 회를 쳐주면 입에서 살살 녹아 넘어가던 그 맛 잊지 못한다.
그리고 중대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가 모래밭에는 MIU대원들이 천막을 쳐놓고 숙영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체격이 좋았고 사복에 장발을 했다. 대외명칭은<해저개발공사>라 하였고 매일 막걸리(암구호)를 우리 중대본부에서 수령했다.
그때는 제대가 들쑥날쑥 이었다. 우리보다 10여기수 앞 선임들은 30개월도 안되어서 제대했는데 차츰차츰 늘어나더니 아예 제대가 중단되었다가 나는 35개월 만에 제대를 했다.
아마도 당시 김포 5여단을 2사단으로 증편하고 포항 사단에 7연대를 창설하느라고 인원이 모자랐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제대 이틀 전까지 해안근무를 하고 대대본부에 집합했다.
연병장에 도열해 있는 우리들에게 대대장(하태욱 중령)은 “귀관들 사회에 나가서 쓸데없이 어슬렁거리지 말고 뭐든지 열심히 하기를 바란다. 나도 머지않아 옷을 벗고나면 똥푸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것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훈시였다.
같이 근무하던 후임들과 작별인사도 못한 채, 연대본부식당에서 연대장이 베풀어준 간단한 막걸리 파티에 만족하고 다음날 아침 포항을 떠났다.
젠장! 뒤질려고 갔었는데 35개월 동안 전투한번 못해보고 뺑뺑이만 돌다가 제대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부에서 손주와 함께 (0) | 2014.07.03 |
---|---|
국토종주랍시고 (0) | 2014.03.20 |
놀라운 일치 (0) | 2011.03.24 |
무제 (0) | 2010.10.22 |
탐욕이 재앙을 부른다 (0) | 2010.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