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국토종주랍시고

이유랑 2014. 3. 20. 16:20

국토종주랍시고

객기로 시작해서 오기로 걸었던 16박 17일간의 국토종주를 마치고 후유증으로 몸살기가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허접한 후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팔자가 늘어져서 지랄했구먼! 하는 비난을 받을까봐 걱정도 됩니다.

 

정년퇴임을 하고나서 한동안은 느긋한 마음이었으나 1년이 지나고 또 6개월을 지나고 보니까 이대로 늙어가는 것은 너무 허무하다. 아니 너무 억울하다는 심정이었지만 딱히 할 만한 것이 없어 무작정 세월만 까먹다가 지난해 6월말 명예 퇴직한 M의 제안으로 국토종주를 하기로 하고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도보이동을 목표로 2월초 계획에 착수했다.

우선 하루에 40km(100리)를 걷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죽전에 가서 등산화를 새로 구입하고 모란에 가서 의약품과 코펠 등을 구입하는 등 사전준비를 한 다음 등산복을 갖추어 입고 여행기간동안 갈아입을 속옷, 양말, 세면도구 등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배낭에 챙겨 넣고 2. 27일 M과 함께 분당을 출발했다.

 

1일차(2.27일) 성남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이용, 인천터미널까지 가서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인천연안여객터미널까지 갔다.

미리 예약한 선표를 받아 챙기고 부두 근처 식당에서 소주를 곁들어 저녁식사를 한 다음 배에서 마실 요량으로 편의점에서 소주와 안주를 구입하여 제주행 「세월호」호에 승선했다.

배수량 6,825톤 정원 921명의 비교적 큰 여객선이었는데 비수기에다 평일이라서인지 객실에 승객이 반도 차지 않아 좋았다.

18:30 인천항을 출항할 때쯤 갈매기들이 선박난간으로 날아들며 승객들이 던져주는 스낵과자를 잽싸게 채어가곤했다.

선박이 출항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바다는 어둠속으로 묻혀갔다.

 

2일차(2.28일) 아침이 되었는데도 날씨가 흐린 탓인지 일출을 볼 수 없고 멀리 등대불만 간혹 보였다.

제주항 입항 예정시간은 08:30이었으나 선내방송을 통해 08:50경 입항예정임을 알렸다.

선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대충 씻고 하는 사이 선박을 제주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선박에서 하선하여 「관음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제주동초등학교쪽으로 대충 방향을 잡고 걸어서 올라갔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관음사 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니 이게 웬일! 평일에는 「관음사」로 가는 버스가 없고 공휴일에만 운행한단다.

「관음사」코스를 이용해서 한라산 백록담을 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는 수 없이 제주시청 앞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서귀포로 가는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성판악정류소에서 하차했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아주 불친절한 휴게소에서 김밥과 생수를 사고 커피를 마신다음 10:30경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진달래밭대피소」에 12:00까지 도착해야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를 통과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보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지만 동행하는 M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허덕거린다. 점차 고도가 높아질수록 상대적으로 눈이 더 많이 쌓여있어 미끄럽다. 준비해간 아이젠을 등산화에 부착하고 속도를 내보려고 했지만 「사라오름」에 이르러서 부터는 M이 아예 포기하려한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조금 무리인 것 같았다.

「성판악안내소」에서 「진달래밭대피소」까지 7.3km 구간을 보통사람 기준으로 3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는데 나는 1시간 30분에 해치울 욕심이었으니까

M의 아들이 챙겨준 약초술을 등산로 옆에서 오징어포를 안주로 한잔 들이킨 다음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13:00을 넘겨서야 가까스로「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했다.

한시간 반정도 가면 되는 정상정복이 물거품 되어버려 허탈한데 그 와중에도 동행한 M은 인증사진을 남겨야 한다고 부지런히 스마트폰을 들고 설친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서 김밥과 나머지 약초술을 마시고 어정대다 보니까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15:00전에 모두 하산해야한다고 재촉한다.

눈길에 미끄러지며 「성판악안내소」로 내려와서는 다시 제주시 방면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교래입구정류장에 하차하여 성산포행 시외버스를 기다렸으나 1시간 가까이 기다려도 좀체 오지 않다가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성산포행 710번 시외버스가 왔는데 우리 둘을 포함, 승객은 달랑 4명이었다. 그러니 배차간격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성산포항으로 가기전 동남이라는 마을에서 하차해 저녁식사를 한 다음 「제주룩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2인1실 하루 5만원인데 비교적 깨끗하고 친절했다.

 

3일차(3. 1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에 근처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이용해 성산포항으로 갔다.

성산포항 매표소에서 장흥행 선박표를 예매하려고 하니 17:00까지 오란다.

남은 시간을 올래길과 성산일출봉 구경을 하기로 하고 거추장스러운 배낭을 어디다 맡길까 하고 기웃거렸는데 항만관리실에서 혼자 있던 여직원이 거리낌 없이 받아준다.

이슬비를 피하려고 나는 1회용 우비, M은 우산을 받쳐 들고 올래길을 걸어 성산일출봉(입장료 1인당2천원)을 올라갔다.

일출봉 정상에서 M은 또 인증사진을 찍겠다고 설쳐댄다.

그 와중에 손에 들고 있던 생수병을 계단 아래로 떨어트렸는데 밑에 계단으로 가고 있던 중국인관광객으로 보이는 60대 부부가 냉큼 주워들고 가버린다. 일출봉을 내려와서 다시 이어진「올래길」을 걷고 나서는 「우리봉식당」이라는 곳에서 반주를 겸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빗길을 걸어 성산포항으로 돌아와서 맡겨둔 배낭을 찾은 다음 장흥 노력항행 선표를 구입하고 배에서 마실 소주와 안주를 샀다.

전남 장흥과 제주 성산포간을 최고38노트의 속도로 오가는 4,200톤급 정원 825명의 쌍동쾌속카훼리선「오렌지호」

성산포항을 17:00 에 출항하여 2시간 20분후인 19:20 장흥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그날따라 선박기관에 이상이 있어 20:50경 장흥노력항에 도착했다.

컴컴한 부두에서 방향감각조차 잃은 채 허둥대다가 민박집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회진대교로 빠지는 도로를 따라 쭉 걸어오면 민박집 간판이 보인다고 한다.

민박집을 찾아가는 길에 어느 승용차 멈춰서더니 운전석에서 “어디까지 가느냐? 친절하게 묻는다. “고맙지만 다 왔다”고 사양하고 한참을 더 걸어서 민박집에 도착하니 할머니 한분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반겨준다.

식당을 물어보니 시간이 늦어서 다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라면으로 저녁을 때울 요량으로 슈퍼나 편의점을 찾았더니 할머니가 집에서 담근 김치를 우리방 냉장고에 넣어주고 직접 우리를 데리고 마을 안쪽 가게까지 인도했다. 그런데 이런 구멍가게마저 문을 닫아버렸네... 할머니가 가게문을 한참 두드린 후에야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주인할머니가 가게 쪽방 문을 열고나와 마뜩찮은 눈길로 우리를 맞이한다.

라면과 소주 그리고 고마운 민박집 할머니에게 줄 과자를 사서 민박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 소주를 곁들여 먹었다.

그날 점심때 소주 각 1병씩, 성산포에서 장흥으로 오는 배안에서 또 각 1병씩, 저녁인가 밤참인가 라면으로 또 소주 3병을 둘이서 깟으니 그날은 1인당 소주 3병반을 마신 셈이었다.   ------                                                                                                                                                                                                                                                                                                                                                                                                                                                                                                                                                                                                                                                 

4일차(3. 2일) 다소 늦은 아침,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니 잔잔한 바다 저 멀리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보이고 갈매기들이 한가롭게 나는 조용한 아침, 정말 아름다운 그림,

마치 동화속에 빠져든 느낌이었다.

아침은 전날 밤 사둔 라면을 삶아먹고 본격적인 도보종주를 시작했다.

장흥읍 쪽으로 통하는 회진대교를 건널 때는 거센 바람 때문에 추웠는데 관산읍을 지나고 부터는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덥고 발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붙인 파스가 물컹물컹 죽이 되어서 걸음걸이가 고통스러웠다.

23번국도 장흥대로를 계속 걸어 용산면소재지에 이르러 국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평소 느끼한 국밥을 싫어했는데 아침을 라면으로 때운 탓에 다소 허기가 졌는지 맛있게 먹어치웠다.

강진으로 가기위해 장흥읍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다가 순지교앞에 이르러서 요령을 피우려고 샛길로 짐작되는 뚝방길로 접어들었더니 계속 탐진강을 끼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농로길의 연속이다.

앞을 내다보니 국도로 연결되는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뒤에 따라오던 M이 계속 불평을 한다.

하는 수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 순지교를 건너고 순지3거리를 지나 강진 쪽으로 걸어가자 보니 미리 연락했던 M의 친구들이 차를 몰고 마중을 나왔다.

이날은 강진군 도암면에 살고 있는 M의 친구 집에서 머물기로한 날이었다.

강진군 소재지의 사우나에서 샤워를 한 다음 M의 친구인 윤원호씨의 집으로 갔다.

M의 고교 동창생들과 함께 술과 고기, 각종나물이 거창한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이날은 약 32km를 걸은 것  같다.  ㅡㅡ                                                                                                                                                                                                                                    

5일차(3. 3일) 윤원호씨 집에서 일어나 인근에 있는 석문저수지까지 산보를 하고 아침을 먹고 나서 윤원호씨 부부와 함께 승용차를 이용 다산유배지로 갔다.

다산유배지에 이르러서 나 그리고 M, 윤원호씨는 도보로 산을 넘어 「백련사」까지 가고 윤원호씨 부인은 승용차를 운전해 백련사로가 합류하여 녹차를 대접받고 병영면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하멜기념관을 둘러보고 는 군동면 풍동리에 있는 남미륵사를 관람했다.

어마어마한 불상과 광활하고 잘 꾸며진 사찰은 종교와 돈을 생각하게 했다.

신기리에 있는 해상교를 둘러보고 윤원호씨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더 유숙했다.

윤원호씨 부부에게 정말 많은 신세를 졌다.

 

6일차(3. 4일) 윤원호씨 집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 윤원호씨의 차를 이용해 강진의료원까지 가고 그 다음부터 다시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영암으로 가기위해 성전면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품위손상을 무릅쓰고 농로로 들어가 응아를 하고난 다음 다소 가벼워진 상태로 계속 걸어 성전면 소재지를 지나고부터 멀리 월출산이 보였다.

처음 보는 월출산,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고고한 자태가 마치 한폭의 동양화처럼 다가온다.

나는 아직 금강산 구경을 못했지만 월출산은 금강산 못지않은 아름다운 산이라고 느껴졌다.

월출산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길가 축사에 있는 송아지들의 순박한 눈망울조차 정말 예쁘게 보인다.

점심때가 되었는데 도로변에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스로 발견한 길가의 국밥집에서는 자리가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우리 몰골이 너무 흉악스러웠는지...

고속으로 질주하는 대형화물차들이 위협적으로 지나친다.

배고픔과 피곤을 참으며 「풀치터널」을 통과하여 영암에 도착하니 15:20, 영암터미널 못미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소주반주로 해결하고 「리젠시모텔」이란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때 M의 前직장 후배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문자가 왔다.

다행히도 빈소가 우리가 지나온 강진군이어서 우리는 모텔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한 다음 7만원에 택시를 대절하여 강진군 마량면에 있는 장례식장까지 문상을 하고 와서는 소주방에서 저녁대신 해삼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 왔다.

이 날은 약 27km밖에 못 걸은 것 같다.

 

7일차(3. 5일)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을 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영암터미널 건물 내에 있는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나주로 출발했다.

바람이 몹시 불어 걷기 힘들다.

13번 국도를 따라가다 덕진에서 점심을, 신북을 지나고 영산포를 지나 나주시에 도착하여 겨우 「영○장」이라는 여관에 숙소를 잡았는데 너무 후졌다.

비좁은 방, 냄새나는 이불, 인터넷도 안되고 영 맘에 안들었다.

근처 식당에서 소주를 반주로 간단히 식사를 한 다음 일찍 잠들었다.

이날은 약 30km정도 걸은 것 같다.

 

8일차(3. 6일) 여관 근처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光州 송정리를 향해 출발했다.

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출발전 여관에서 발바닥, 발목, 무릎에 파스를 붙였지만 걷는 게 힘들어졌다.

아침에 출발할 때 송정리로 가는 길이 여러 방향 있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아 나주대교를 건너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는데 길을 잘못든 것 같았다.

전날 걸어온 13번 국도를 따라 가야했는데 1번국도로 들어선 거다.

등정삼거리 못미처 주유소옆 소머리국밥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길을 물었더니 역시나 엉뚱한 방향으로 들어선 것이 확인되었다.

마음씨 좋게 생긴 국밥집 주인부부는 우리 몰골이 측은했던지 국밥에 고기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있다.

비위가 약한 나는 억지로 소주를 반주로 해서 반정도 먹고 남길 수밖에 없었다.

남평읍으로 들어가 남평읍오거리 남평읍사거리를 지나 지방도인 회재로로 이동해 광주 서창동에 도착, 극락교를 건너 장성군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극락교를 건너 우회하여 강변으로 내려가 소주를 한잔하면서 계획을 바꾸어 버렸다.

장성까지 가는 것은 문제없으나 그다음 경유지인 백양사에서 정읍까지가 문제라는 M의 주장이었다.

에라, 힘든데 우리 주꾸미나 먹자고 의견 일치되어 당초 계획에 없던 光州에서 일박하고 군산으로 가기로 했다.

다시 극락교를 건너와 상무역 근처에 숙소를 잡기로 하고 모텔을 찾아갔더니 종업원인 듯한 여자가 65,000원을 내라고 한다.

1박 40,000원인데 왜 65,000이냐고 물으니까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으니 그 동안 대실료를 같이 받아야한다는 말.. 우와 고약하다

싹 기분이 망쳐 그대로 나와 지도가 없어 고생했으니 지도를 사자고 해서 근처 서점을 찾아가서 지도를 사고난 다음 M이 자기 처제집에 처형이 와있다고 하여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파트까지 함께 가서 기다렸다가 돌아 나와 숙소를 잡고 변함없이 소주를 반주로 식사를 하고 잠들었다.

이 날은 힘만 들고 약 27km밖에 못 걸은 것 같다.

 

9일차(3. 7일) 숙소 근처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광주터미널로 가서 군산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익산을 거쳐 약 두시간을 달려 도착한 군산은 워낙 생소하여 물어물어 군산수산물종합센터까지 찾아갔다.

수산물센터 입구에서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팔고 있던 주꾸미를 사서 조리를 해주는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대낮부터 소주를 들이켰다.

1kg에 25,000원을 주고 산 주꾸미가 그 자리에서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술이 취한채로 걸어서 시내로 들어가 숙소를 잡고 샤워를 하고는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잤다.                                                    ------

10일차(3. 8일) 숙소 근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익산군 함열읍을 향해 출발했다.

2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축산리에서 지방도로 들어가 서수면을 지나고 함라면에서 칼국수와 소주 각 1명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함열읍으로 들어갔다.

멀리 함열역이 보이는 길목에서 좀 더 지름길로 가겠다고 들어선 길이 공교롭게도 막다른 석재공장, 되돌아가기엔 너무 아까워 철길로 들어갔더니 철길 옆으로 작은 도랑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흐이구 하는 수 없이 배낭을 벗어 도랑 건너편으로 먼저 던진후 점프를 해서 간신히 도랑을 건넜다.

함열역 앞에 있는 허름한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M보다 내가 먼저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갔는데 물이 미지근하다.

일단 머리에 비누칠을 하고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돌려놓고 기다렸는데 어렵쇼? 계속 찬물만 나오네. 모텔에 들어오다 보니 아래층이 목욕탕이었는데 목욕은 아래층에서 하라고 온수를 주지않는건가 제기랄 머리에 비누칠은 잔득한 상태고 하는 수 없이 찬물에 머리를 감고 샤워까지 한다음 방으로 들어가 M에게 얘기했더니 M역시 이상하다는 반응이다.

방안도 서늘해서 카운터에 대고 난방을 요청하면서 온수 얘기를 했더니 카운터에 있던 그 친구 왈 “그 방은 시공할 때 수도꼭지를 이상하게 달아서 반대쪽으로 꼭지를 돌려야 온수가 나오는데 먼저 얘기를 안했네요.” “엥? 이게 뭐야, 나는 이를 악물고 찬물에 머리감고 전신샤워까지 하고나왔는데 하이고” 그냥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에서 나와 부근을 맴돌다가 들어간 식당은 음식값만 비싸고 별로였다.

반주로 소주 각 1병씩을 해치운 후 편의점에서 또 소주 두병과 안주를 사서 모텔로 들어가 나누어 마신 후 잠이 들었다.

이 날은 꼬이는 게 많은 날, 그리고 28km정도 밖에 못 걸은 것 같다.

 

11일차(3. 9일) 모텔에서 나와 아침을 거른 채 논산을 향해 출발했다.

날씨가 다소 서늘해서 걷기에는 괜찮은 편이었다.

두시간 남짓 걷다보니 강경에 다다른다.

여기서 부터는 충남, 젓갈의 고장답게 젓갈판매점이 수두룩하다.

일요일이라서 문을 연 식당이 뜸했다.

조여사백반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반찬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새로운 반찬접시를 가져다주는 정성이 고마웠다.

논산에 도착해서는 숙소를 잡기위해 한참을 헤맸다.

다음 경유지인 공주가 가까운 쪽으로 숙소를 정하려 하니 근처에 식당이 안보여 다시 논산역으로 되돌아와 육교를 건너서 모텔을 잡으려 했지만 들어가는 곳마다 주인이나 종업원이 안 보인다.

그렇다고 싸구려 여인숙에 머무르기는 싫고 하는 수 없이 육교를 되 넘어가서 「타이타닉」이라는 모텔에 숙소를 정했다.

저녁 식사후 피곤이 몰려와 샤워를 하자 말자 잠들었다.

이날은 23km정도 밖에 못 걸은 것 같다.

 

12일차(3. 10일) 아침식사를 하면서 식당주인과 국토종주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공주로 가는 길에 대한 조언을 듣게 됐다.

우리는 계룡을 거쳐 공주로 갈 예정이었는데 식당주인의 말에 의하면 계룡을 거치지 않고 새로난 도로를 따라 23번 국도를 타게되면 빠르다는 것, 계획을 수정하여 계룡을 거치지 않고 공주로 바로 가기로 했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공주에 도착, 「괌모텔」이라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날은 약32km정도 걸은 것 같은데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

 

13일차(3. 11일) 예정된 대로 정안면으로 가기위해 모텔을 나와 공주대교를 건넌 다음 공주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정안을 통과하는 23번 국도로 연결되는 지방도 백제큰길은 우측으로 정안천을 끼고 북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도로폭이 좁아 차량이 오갈 때는 갓길 밖으로 나가 서있어야 할 정도로 협소했다.

23번 국도에 들어서서는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이어지고 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썼지만 가끔 밭에 뿌린 거름냄새가 풍겨왔다.

M과 나는 이제 많이 지친 상태가 되어 서로간 대화도 별로 없이 묵묵히 도로표지판만 보고 앞으로 나가는 상태다.

정안에 도착하기전 정안면 유일의 숙박업소인「광정모텔」에 전화를 해두었다.

정안읍소재지에 도착, 부흥식당에서 반주를 겸한 점심식사를 하고 농협마트에 들려 패트병소주 2개를 사고 약국에서 발바닥과 무릎에 붙일 파스를 산 다음 「광정모텔」로 찾아가 여장을 풀었다.

각자 샤워와 간단한 손빨래를 한 다음 쉬었다가 점심식사를 했던 부흥식당에 부대찌개를 시켜서 소주를 곁들어 저녁식사를 한 다음 일찍 잠들었다.

이날은 22km 정도 밖에 못 걸은 것 같다.

 

14일차(3. 12일) 천안으로 가기 위해 조금 일찍「광정모텔」에서 나와 전날 식사했던 부흥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곤 묵직해진 발길을 옮겼다.

읍소재지를 벗어나 23번 국도로 접어들자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차령휴계소쯤에 이르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경사가 완만해도 오르막길은 역시 힘들다.

해병대군가, 선구자, 박인희가 불렀던 방랑자를 읆프며 앞으로 나갔다.

길이 490m의 차령터널을 지나자 빗줄기가 굵어진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라 다소 힘이 덜 들었지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못된 운전자의 차량이 일부로 도로변 쪽으로 바짝 붙여 달리며 위협을 주고 물탕세례를 퍼붓는다.

에이 ××× 거침없이 욕설이 나온다.

힘들어도 길가에 비를 피할만한 자리가 없다,

쉬지 않고 약 9km 정도 걸어 1번국도로 들어가 백제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곤 다시 걸었다.

목천휴게소에 있는 ‘현무관’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천안시내로 들어갔다.

미리 약속하였던 학인이를 만나 식당에서 소주를 마신 다음 「제우스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떨어졌다.

이날은 약 28km를 걸은 것 같다.

 

15일차(3. 13일) 평택으로 가기 위해 조금 일찍「제우스모텔」에서 나와

분식점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때웠다.

라면을 먹고 있던 중에 TV에서 찌질 한 아침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 것을 보고 M이 한마디 하자 식당아주머니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자기 동생의 교통사고처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며 가해자 측과 조사담당 경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는데 듣기 거북했다.

1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성환에 도착,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 기사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계속 걸었다.

막바지에 이르자 힘들다.

8kg 남짓한 배낭인데도 어깨가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무릎, 발목, 발바닥이 욱신거린다.

평택역 부근에 도착해 숙소를 찾던 중 M이 ‘파주옥’이라는 식당을 발견하고는 “저기가 유명한 곳”이라고 가리킨다.

처음 찾아간 모텔에서는 시간이 이르다고 光州에서 처럼 대실료까지 내라고 하는 통에 그대로 나와 ‘파주옥’으로 갔다.

안주로 우족을 시켜놓고 소주 3병을 마셨는데 49,000원이 나왔다.

우 - 비싸다.

「티파니」라는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샤워를 한 다음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

이날은 25km정도 밖에 못 걸은 것 같다.

 

16일차(3. 14일) 기흥으로 가기 위해 「티파니모텔」을 나와 동복시장 골목에서 콩나물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1번 국도를 따라 송탄을 거쳐 오산에 도착하니 느닷없이 싸이렌소리가 울려 퍼진다.

매달 15일이 민방공훈련의날인데 다음날이 토요일이라서 하루 앞당겨 실시하는가보다.

점심시간을 넘겨 시장한데 사거리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고 기다렸다.

오산종합운동장 못미처 ‘시골밥상’이라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마친 후 1번국도를 벗어나 기흥 쪽으로 연결되는 지방도로 발길을 옮겼다.

동탄을 지나 고매파출소 부근에서 숙소를 잡을 예정이었는데 숙박업소가 보이지 않는다.

지친 몸을 이끌고 기흥저수지를 지나 상갈 동에 이르러서야 「에이스」라는 호텔을 발견하고 숙소를 정했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일찍 잠들었다.

이날은 약 35km정도 걸은 것 같다.

 

17일차(3. 15일) 서울에 다가오니 묘한 기분이다.

길게만 느껴졌던 국토종단이 이제 끝나다니

「에이스호텔」을 근처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는 구갈, 구성, 보정, 죽전, 오리, 미금을 거쳐 대왕판교로로 들어가 금곡동에 있는 ‘진봉화로’라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판교와 고등동을 거쳐 서울 강남구 세곡동에 도착했다.

드디어 국토종주가 끝났다.

세곡초등학교 부근에 있는 ‘영동생고기’집에서 쫑파티를 하고는 귀가

 

후기

그야말로 객기로 시작해서 오기로 해치운 국토종단이었다.

開花시기를 택해 꽃구경하며 北上하고자 했는데 조금 일렀고 하루에 40km이상 도보로 종주할 계획이었지만 무리였다.

중간에 光州에서 群山으로 점프하는 통에 도보구간이 줄어들었지만 사실 계획대로 光州에서 長城, 井邑, 익산을 도보로 이동했었다면 이보다 후유증이 더컸을거다.

발목과 발바닥 그리고 무릎에 파스를 붙인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걷는 것이 너무 힘들어 세상사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사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의미도 느낄 수 있었다.